십구사략 2
≪십구사략十九史略≫이란
≪십구사략十九史略≫은 태고太古에서 원元나라까지의 중국 역사를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등에서 채록採錄하여 축약한 책이다. 원본原本은 송말원초宋末元初의 학자 증선지曾先之가 풍속風俗의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편집한 ≪십팔사략十八史略≫인데, 기존 송宋나라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던 것을 명明나라의 여진余進이 원사元史를 덧붙이고 서명을 ≪십구사략≫으로 재편하였다.
≪십구사략≫은 한중일韓中日 여러 곳에서 어린 아이를 가르치기 위한 몽학서蒙學書로 널리 읽혔으며, 조선에서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학자가 ‘사史’ 분야에 입문하는 책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사를 이해하는 개괄적인 내용이 압축되어 실려 있고, 다른 역사서에 비해 분량도 적었으므로 왕세자王世子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 자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었다. 19세기 조선이 멸망하고 유학이 쇠퇴한 이후로 차츰 수요가 줄어들었으나, 근래 현대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고전古典으로 재해석되어 만화와 번역서 등으로 다수 출간되고 있다.
≪십팔사략≫과 ≪십구사략≫
대중적인 인지도나, 시중에 출판된 여러 책들이 모두 ≪십팔사략≫을 표방하고 있는 가운데, 본서에서 ≪십구사략≫을 서명書名으로 선정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선 두 서종의 가장 큰 차이는 기록에서 다루는 시기인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십팔사략≫이 태고太古시기부터 송宋나라까지를 기록했다면, ≪십구사략≫은 여기에 원사元史를 덧붙였다. 완성된 ≪십구사략≫의 완칭完稱은 ≪고금역대표제주석십구사략통고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이며, 본서는 이 책을 저본으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더 많이, 더 오래, 더 널리 유행하였는지가 중요하다. 15세기 중반 ≪십팔사략≫과 ≪십구사략≫의 대표본이 완성되고, 이는 각각 조선과 일본으로 유통되어 널리 읽혔다. 조선은 초기에 두 종의 책이 모두 유입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로 ≪십팔사략≫의 전수는 점차 사라지고, ≪십구사략≫이 주로 유통되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명明나라를 정통正統으로 하는 주자학朱子學과 중화中華 의식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정창순鄭昌順이 중심이 되어 명사明史를 추가로 넣어 간행하는 등 송宋-원元-명明을 잇는 유가적儒家的 정통성正統性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에서만 확인되는 특수한 현상이었고, ≪십팔사략≫이 주로 유통된 중국?일본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책 속으로
옛적에 예락醴酪이라는 술이 있었는데 우禹가 다스리는 시기에 이르러 의적儀狄이란 사람이 술을 만들었다. 우가 술을 맛보고 맛있게 여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의적을 멀리하였다.(≪십구사략 1≫, 39쪽)
어느 날 계찰이 상국上國(오吳)으로 빙문聘問하러 가는 길에 서徐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서나라 군주가 그의 보검寶劍을 매우 갖고 싶어 하였다. 계찰이 그 눈치를 알고서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에 들렀으나 이미 서나라 군주가 죽고 없었다. 결국 칼을 풀어 그의 묘에다 걸어놓고 돌아왔다.(≪십구사략 1≫, 72쪽)
평원군平原君이 말하였다. “뛰어난 인물이 세상에 있게 되면 마치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부지불식간에 그 끝이 삐져나오게 되는 것이오. 그런데 이제 선생은 나의 문하에 들어온 지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이렇다 할 소문을 들은 바가 없소.” 모수毛遂가 대답하였다. “저를 한번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게 하시면 안쪽의 자루까지도 튀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찌 송곳의 끄트머리만 보일 뿐이겠습니까.”(≪십구사략 1≫, 133~134쪽)
어느 날 동방삭東方朔이 무제武帝를 모시고 있는 주유侏儒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너를 죽이려 하신다.” 하니, 주유는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무제는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동방삭이 말하기를 “주유는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인데, 신 동방삭은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옵니다.” 하였다.(≪십구사략 2≫,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