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근대 자유민주 사상가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보수와 진보
어차피 인생이란, 제 몫의 분량을 責務할 따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허망한 욕심일뿐, 제 몫 이상도 이하도 不得已다. 그러니 여느 노랫말처럼, ‘잘난 놈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대로 사는’ 인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지 보다 잘 살고 싶은 것은 人之常情이다.
이는, 運命論이나 宿命論 따위를 거론코자 함이 아니다. 天地自然의 원리가 본래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富와 名譽와 權力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지구별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애당초 모든 인간존재들이 평등하게 누릴만한 여건이 不備하다.
그러한 바는, 인구가 稀少할 때나, 산업화 이후 急增한 때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존재가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차피 稀貴해 질 수밖에 없으며, 희귀하므로 그 가치는 점점 치솟게 되고, 희귀함을 향유할 수 있음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음이다.
다만, 제 역량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과거의 신분제 사회에 비한다면, 현대사회는 적어도 법률적으로도 공평한 기회쯤은 보장되어 있다. 물론 ‘기회균등’이라는 개념도, ‘세계평화’나 ‘만민평등’이라는 개념만큼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개념일 따름이다. 당최 실현될 수 없는 인식적 개념에 불과한 탓이다.
현실세계에서 만인에게 결코 기회는 균등할 수 없으며, 세계는 평화로울 수 없으며, 만민은 평등할 수 없음은, 역사로써 검증되며, 굳이 역사가 아니더라도,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원리인 탓에, 살다보면 저절로 체득케 된다.
이러한 不均等, 不平和, 不平等의 세계일지라도, 부득이하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토대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가 흔들리게 되면, 애당초 생존이 불투명하므로, 이런저런 것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존의 토대는 國家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국가를 지니지 못한 탓에, 수천 년 동안 참으로 가혹한 역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를 침탈당한, 예컨대 ‘티베트’의 경우, 참으로 가혹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살아내고 있다.
우리 민족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국가를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국가를 빼앗긴 국민에게는, 이제 개인도 가정도 가족도 가문도 고향도, 죄다 박탈되어버린다. 그러다보니 窮餘之策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서, 他國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의 떠돎이란, 그야말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지칭하던 것처럼, ‘亡國奴’의 신세일 따름이다. ‘망국노’란 ‘國家를 잃어버린 노예’라는 의미다. 이는, 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서, 중국 땅에 빌붙어 사는 조선인들을, 중국인들이 卑下하며 부르던 명칭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만주는 물론이며, 중국대륙의 대부분은, 본래 우리 韓民族(東夷族 聯合)의 영토였다. 현대 중국인의 실질적인 민족적 祖上이라는 漢族의 漢나라의 영토는, 東北工程이나 上古史 문제와 얽혀 異說이 紛紛하지만, 대체로 ‘베이징’ 이남의 지역인 것으로 比定될 따름이다.
여하튼 중국인들은, 중국대륙이 마치 漢族의 땅인 양 착각하며 억지부리지만, 漢族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것은 漢나라, 宋나라, 明나라 쯤이며, 그 영역도 현재의 중국 영토에 비해 지극히 협소했다. 그리고 그 외의 왕조들은 죄다 異民族의 국가체제였다.
현대의 중국이, 漢族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된 것은, 2차례 세계대전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을 죄다 强合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재의 중국은, 漢族의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연합국’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漢族의 민족적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여러 모로 ‘중화민국(대만)’이 좀 더 漢族다울 수 있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늘 ‘中國 分裂’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지니는 것이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내색하지 못할망정, 독립하여 자기 민족의 국가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언제 어떻게 폭발하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중국 내 ‘조선족’이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부득이하여 중국인이나 고려인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어쨌거나 韓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라는 토대야말로, 現在的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국가이익(國益) 우선’이라는 점도,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국익을 지켜내지 못하면, 국가도 지킬 수 없음은,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우리 민족은 古朝鮮, 高句麗, 渤海, 統一新羅, 高麗 시대 이후에는, 朝鮮王朝로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强大國을 事大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실정이다. 스스로 강대국일 수 없으면, 어쨌거나 생존을 위해 강대국의 決定을 수용해야만 한다. 弱肉强食의 국제정치의 場에서, 戰爭主義와 事大主義 이외에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는 거의 없는 탓이다.
‘事大主義 思惟方式’은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慣性을 정지시키거나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예컨대, 韓中日 3국의 역사로써, 여실히 검증된다. 3국 관계의 ‘사대주의 프레임’은, 아주 긴 역사의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탓에, 어떤 激變에 의해서도 쉬이 변화되기 어렵다.
여기서 frame 개념은 ‘認識 틀’이라는 뜻으로서, 여러 의미가 있다.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인 ‘토드 기틀린’은, 프레임 개념을 원용하여, 매스미디어의 보도가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바로 그러한 ‘프레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기틀린’은 ‘프레임’을, “상징 조작자가 상례적으로 언어적 또는 영상적 담화를 조직하는 근거로 삼는 인식, 해석, 제시, 선별, 강조, 배제 등의 지속적인 유형”이라고 정의했다.
그간 프레임은 학계에서만 사용됐으나, 2006년 4월,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가, 국내에 번역·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저널리즘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레이코프’는,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며,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고 주장했다.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이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의 ‘票心(voting intentions)’을 가르는 것은, 진실이나 훌륭한 대안이나 정책의 상세 목록들이 아니라, 가치와 인간적 유대, 진정성, 신뢰,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프레임은 ‘이데올로기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한번 프레임이 결정되고 작동하기 시작하면, 당최 그것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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