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폴
「케르폴」(1916)은 가정 폭력 그 공포에 관한 기록이다. 집은 가장 안락한 공간이자 가장 잔인한 폭력의 공간이다.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선 공간이다. 「케르폴」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시녀를 부르는 벨소리」와 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점을 가진다. 「시녀를 부르는 벨소리」가 영국의 대저택을 배경으로 한다면, 「케르폴」은 프랑스의 고색창연한 고성이 배경이다. 미국인 화자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같다. 유령이 등장하는 것도 같지만 「케르폴」의 유령은 사람이 아니라 개다. 이 두 작품만 읽어도 작가 이디스 워튼이 사실주의자로서 유령을 활용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요컨대 ‘유령을 믿진 않지만 무서워한’ 워튼에게 유령은 폭력과 억압을 거칠지 않게 드러내는 완충제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미국인 일인칭화자는 프랑스인 친구, 랑리뱅의 권유로 브르타뉴의 한 고성(대저택)을 사려고 한다. 일단 혼자서 집을 구경하러 간 화자. 긴 가로수 진입로, 해자, 도개교, 성벽 순찰로에 이르기까지 옛 성의 자취를 물씬 풍기는 웅장한 건물이다. 이름 하여 케르폴. 고색창연하다 못해 일부는 폐허의 조짐을 보이는 이 케르폴에 좀처럼 인적이 없다. 화자는 관리인을 기다려보지만 그 대신 나타난 것은 한 무리의 개들이다. 전혀 짖지 않고 화자를 감시하듯 따라다니는 침묵의 애견들. 화자가 이 케르폴에서 겪은 기묘함과 호기심은 이곳에서 17세기에 벌어진 살인 사건과 그 재판 기록으로 연결된다.
폐쇄된 공간, 과거의 범죄, 폭력, 감금, 초자연적 복수 등등 「케르폴」은 워튼의 작품 중에서도 고딕 요소들이 짙고 풍부하다. 워튼은 공간 다시 말해 집에 등장인물(특히 여성)의 활동반경을 제한하는데 공을 들인다. 겨울, 춥거나 궂은 날씨가 한몫한다. 귀족이 누군가를(반려견 정도의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대로 감금하고 죽여도 되는 시대면 더 확실하다. 「케로폴」에서처럼, 어쩌면 지금 21세기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