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안성역에서
옛 안성역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시민의 공원이 내혜홀(奈兮忽)광장이다. 내혜홀은 낮골, 즉 지역이 낮은 고을이라는 말로, 안성의 토박이말로도 낮골로 불린다.
안성시(安城市)는 경기도 남단의 동경 127°06'∼127°31', 북위 36°53'∼37°09'에 위치하고 있는 자치시로 동쪽은 이천시·음성군, 서쪽은 용인시·평택시, 남쪽은 천안시·진천군, 그리고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안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이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인접지역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곳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죽산면 장원리와 삼죽면 내장리·율곡리에서 민무늬토기와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을 이루어 마한지역 병탄정책을 실현한 귀중한 병참기지였다. 그 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가 마한 전역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이남의 백제영토를 점령하고, 중앙집권적 제도를 실시할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奈兮忽)로 불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 안성현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단련사가 두어졌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수주(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되었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 다시 분리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배치되었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의 방호별감 송문주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 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가 유린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국난을 당했을 때에도, 양광도(지금의 경기도)의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계책으로 적에게 거짓 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장을 유인, 6명을 참수하는 개가를 올려서 적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송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극적루지가 안성읍에 있으며, 이 공로로 1362년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수주 관할이었던 양량·감미·마전·신곡 등 네 부곡이 안성군에 소속되었다. 1366년 공민왕의 총신 김용의 수뢰가 탄로나 마전·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인 1399년(정종 1) 안성군 양량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는 이 때 죽산현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연창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일명 홍자수)와 경기조방장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 때 축성한 서운산성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 무장 박찬신, 중군 박문수·조현명 등이 이끄는 정예 정규군과 이인좌의 무리인 정희량·박필현·남태징·박필몽 등의 반군이 이곳에서 대진하여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전승을 기념하는 도순무사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가 낙원동에 있다.
1895년 공주부 안성군·양